필리프 프란츠 폰 지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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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필리프 프란츠 폰 지볼트는 1796년 독일에서 태어난 의사이자 일본학 연구가이다. 그는 네덜란드 군의관으로 일본 데지마에 파견되어 란학을 가르치고 일본 문화를 연구하며, 일본의 지리, 생물, 민속 등을 유럽에 소개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일본 지도를 입수하여 국외로 반출하려다 적발되어 추방당하는 '시볼트 사건'을 겪었지만, 이후 일본에 재방문하여 고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지볼트는 일본학 연구의 선구자로서 일본 근대화에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다양한 식물, 동물, 지명 등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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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프 프란츠 폰 지볼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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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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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이름 | 필리프 프란츠 발타자르 폰 지볼트 |
출생 | 1796년 2월 17일 |
출생지 | 뷔르츠부르크, 뷔르츠부르크 주교후국 |
사망 | 1866년 10월 18일 |
사망지 | 뮌헨, 바이에른 왕국 |
국적 | 독일 |
직업 | 의사, 식물학자 |
배우자 | 구스모토 다키, 헬레네 폰 가게른 |
자녀 | 구스모토 이네, 알렉산더 폰 지볼트, 하인리히 폰 지볼트 |
학문 분야 | |
분야 | 의학, 박물학 |
출신 대학 | 뷔르츠부르크 대학교 |
지도 교수 | 요한 루카스 쇤라인 교수, N. 폰 에젠베크 교수 |
학문 자문 | 이그나츠 델링거 교수 |
영향 | 뒤트르퐁 교수 (산과학), 텍스톨 교수 (이론 외과학) |
약칭 (식물학) | Siebold |
업적 | |
기타 | |
관련 정보 | 오란다인으로 위장하여 일본에 입국. "지볼트"는 네덜란드어 발음에 가깝다. |
2. 생애
독일 뷔르츠부르크의 의학 명문가에서 태어난 필리프 프란츠 폰 지볼트는 의학을 공부한 후 네덜란드 군의관으로 임명되어 1823년 일본 나가사키의 데지마에 부임했다.[1] 그는 데지마 상관의 의사로 활동하며 서양 의학 지식을 전파하는 한편, 나가사키 외곽에 나루타키 학원을 열어 일본인 제자들에게 의학과 란학을 가르쳤다.[3] 동시에 일본의 동식물, 민속, 문화 등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했으며, 일본인 여성 구스모토 타키와의 사이에서 딸 구스모토 이네를 두었다.[1]
1828년, 에도 막부가 국외 반출을 엄금한 일본 지도를 입수하려 한 사실이 발각되어 스파이 혐의를 받고 가택 연금되었다가 1829년 추방되었다. 이 사건을 '시볼트 사건'이라 부른다.[1]
유럽으로 돌아온 지볼트는 네덜란드 레이던에 정착하여 일본에서 수집한 방대한 자료를 정리하고 연구하는 데 몰두했다.[1] 그는 『일본』(Nipponde), 『플로라 자포니카』(Flora Japonicala) 등 중요한 저서를 출간하여 유럽 사회에 일본의 자연과 문화를 체계적으로 소개했으며, 이는 서양의 일본학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수집품은 오늘날 레이던 국립 민족학 박물관과 Naturalis 생물다양성 센터의 중요한 소장품이 되었다.[6][8]
1858년 일본 정부의 추방령 해제 후, 1859년 다시 일본을 방문하여 네덜란드 상사의 고문, 에도 막부의 외교 고문 등으로 활동했으나,[12] 복잡한 정치 상황 속에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고 1862년 유럽으로 돌아왔다. 이후 일본으로의 재방문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866년 뮌헨에서 사망했다.[1]
지볼트는 일본에서 "시보루토 씨"로 불리며 서양 문물을 전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으며, 서양에서는 그가 명명하거나 소개한 많은 식물들을 통해 알려져 있다. 레이덴 식물원에는 그가 보낸 식물들로 조성된 "폰 지볼트 기념 정원"이 있다.[17]
2. 1. 초기 생애
필리프 프란츠 폰 지볼트는 신성 로마 제국의 주교령이었던 뷔르츠부르크(현재 독일 연방 공화국 바이에른 주 북서부)에서 태어났다.[1] 그의 집안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뷔르츠부르크 대학교의 의사였던 의학 명문가였다. 아버지 요한 게오르크 크리스토프 폰 지볼트는 뷔르츠부르크 대학교 의학부 산부인과 교수였으나, 지볼트가 1세 때 3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후 지볼트는 하이딩스펠트에 사는 외삼촌에게 길러졌다. 지볼트가는 1816년 바이에른 왕국의 귀족 계급으로 인정받아 성 앞에 폰(von)을 사용하게 되었다.9세 때 어머니와 함께 마인강 근처의 하이딩스펠트로 이주하여 1810년 뷔르츠부르크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그곳에서 자랐다. 12세부터는 지역 사제인 삼촌에게 개인 교습을 받고 교회의 라틴어 학교에 다녔다. 1815년 11월, 뷔르츠부르크 대학교에 입학하여 처음에는 철학을 공부했으나, 가문의 전통과 주변의 권유에 따라 의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1] 대학 시절에는 해부학 및 생리학 교수 이그나츠 뢸링거 (1770–1841)의 집에서 기숙하며 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뢸링거는 의학을 자연과학의 관점에서 접근한 선구적인 학자였으며, 지볼트는 그의 집에서 여러 과학자들과 교류하며 학문적 시야를 넓혔다.[1] 또한 식물학 교수이자 ''Flora Wirceburgensisla''("뷔르츠부르크 대공국의 식물상", 1810–1811)의 저자인 프란츠 자버 헬러 (1775–1840)에게도 가르침을 받았다.[1] 유명한 자연과학자이자 탐험가인 알렉산더 폰 훔볼트의 책을 읽으며 먼 세계에 대한 탐험의 꿈을 키웠다.[1] 대학 재학 중에는 코르 뫼니아 뷔르츠부르크라는 학생 단체에 소속되어 활동했으며, 33번이나 결투를 벌일 정도로 자존심이 강하고 활동적인 성격이었다.
1820년 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하이딩스펠트에서 잠시 의사로 활동했다.[1] 이후 가족 지인의 소개로 네덜란드로 건너가, 네덜란드 식민지로 갈 기회를 얻기 위해 군의관직에 지원했다.[1] 1822년 6월 19일 네덜란드 군에 입대하여 프리깃함 ''아드리아나''의 선의로 임명되었고, 로테르담을 출발하여 네덜란드령 동인도(현재의 인도네시아)의 바타비아(현재의 자카르타)로 향했다.[1] 항해 도중 네덜란드어 실력을 향상시키고 말레이어를 빠르게 습득했으며, 해양 동물 표본을 수집하는 등 학문적 탐구를 계속했다.[1] 1823년 2월 18일 바타비아에 도착했다.[1]
군의관으로서 포병 부대에 배치되었으나, 병을 앓아 회복을 위해 네덜란드령 동인도 총독 고데르트 판 데르 카펠렌 남작의 관저에서 몇 주간 머물게 되었다. 그의 해박한 지식은 총독과 바타비아 식물원장 카스파르 게오르크 카를 레인와르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1] 이들은 지볼트가 과거 일본의 데지마에 거주했던 의사이자 학자인 엥겔베르트 켐퍼(''Flora Japonicala''의 저자)와 칼 페터 툰베르크의 뒤를 이을 만한 인물이라고 판단했다.[1] 곧 바타비아 예술 과학 아카데미는 지볼트를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2. 2. 일본으로




동양학 연구에 뜻을 둔 지볼트는 1822년 네덜란드 헤이그로 가서 국왕 빌럼 1세의 시의를 통해 네덜란드령 동인도 육군 병원의 외과 소령으로 임명되었다. 이는 단순한 의사 파견을 넘어, 바타비아의 총독에게 보낸 서한에 "외과 소령 및 조사 임무 부착"이라고 서명하고, 에도성 혼마루 상세 도면이나 사할린 측량도 등 군사적, 정치적 자료를 수집한 정황으로 보아 학술 연구 외 다른 목적도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1823년 6월 28일, 지볼트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몇 달을 보낸 후, 나가사키의 인공섬이자 네덜란드 무역 기지인 데지마에 상주 의사 겸 과학자로 부임하여 1823년 8월 11일 도착했다.[1] 일본으로 가는 길은 순탄치 않아, 동중국해에서 태풍을 만나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1] 당시 데지마는 극소수의 네덜란드인만 머물 수 있었기에, 지볼트는 의사와 과학자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야 했다. 데지마는 본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 소유였으나, 회사가 파산한 후 네덜란드 정부가 정치적 이유로 직접 운영하며 일본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유럽에서 식물학 지식을 갖춘 의사를 일본에 파견하는 것은 지볼트 이전에도 선례가 있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으로 1690년부터 1692년까지 일본에 머물렀던 독일 의사이자 식물학자 엥겔베르트 켐퍼(1651–1716)가 그 시작이었으며, 스웨덴 출신의 카를 페테르 툰베리(1743–1828) 역시 1775년 일본에 도착하여 활동했다.
지볼트는 데지마에서 의사로 활동하며 서양 의학 지식을 전파하는 한편, 과학자로서 일본의 동식물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일본인 조수들과 화가 가와하라 게이가 등의 도움을 받아 방대한 자료를 수집했다. 가와하라는 지볼트의 초상화를 비롯해 다양한 동식물 그림을 남겼다. 또한 지볼트는 일본인 여성 구스모토 타키와의 사이에서 딸 구스모토 이네를 두었는데, 이네는 훗날 일본 최초의 여성 서양 의사가 되었다.
1826년, 지볼트는 막부의 쇼군을 알현하기 위해 에도(현재의 도쿄)로 가는 여행길에 올랐다. 이 긴 여정 동안 그는 많은 동식물 표본을 수집하는 한편, 막부의 천문학자 다카하시 가게야스로부터 이노 다다타카가 제작한 일본과 조선의 상세 지도를 입수했다. 이는 당시 일본 정부가 외국으로의 반출을 엄격히 금지하던 것이었다.[1] 지볼트가 금지된 지도를 소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발각되자, 일본 당국은 그를 스파이 혐의로 체포하여 가택 연금에 처했다.[1]
결국 지볼트는 1829년 10월 22일 일본에서 추방 명령을 받았다.[1] 그는 자신의 연구가 일본인 협력자들에 의해 계속될 것이라 믿으며, 수집한 수천 점의 동식물 표본과 자료, 책, 그리고 문제의 지도를 가지고 프리깃함 '자바'호를 타고 바타비아로 돌아갔다.[1] 바타비아의 식물원에는 그가 수집한 2,000여 종의 살아있는 식물이 보내졌다. 지볼트는 1830년 7월 7일 네덜란드에 도착했으며, 일본과 바타비아에서의 체류 기간은 총 8년이었다.[1]
2. 3. 나루타키 학원
일본 학자들은 서양 과학 지식을 배우기 위해 지볼트를 초청했고, 지볼트는 그 대가로 일본과 일본 문화에 대해 배울 기회를 얻었다. 그는 영향력 있는 지역 관료를 치료한 후 데지마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특별 허가를 얻어, 이를 계기로 데지마 주변 지역의 일본인 환자들을 치료하며 교류를 넓혔다. 지볼트는 일본에 예방 접종과 병리학적 해부학을 처음으로 소개한 인물로 평가받는다.[2]1824년, 지볼트는 나가사키 외곽 나루타키 지역에 서양 의학 교육기관인 '''나루타키 학원'''(鳴滝塾|나루타키주쿠일본어)[3]을 설립했다. 이 학원은 일본 초기 서양식 의학 교육 기관 중 하나로, 일본 전역에서 모여든 약 50명의 학생들에게 란학(蘭學, 네덜란드를 통한 서양 학문)을 가르치는 중심지가 되었다. 학생들은 의학 교육을 받는 동시에 지볼트의 식물학 및 자연사 연구를 보조했다.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네덜란드어는 이곳에서 학문 교류의 주요 언어(공용어) 역할을 했다.
나루타키 학원은 많은 인재를 배출했는데, 대표적인 인물은 다음과 같다.
인물 | 주요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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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노 조에이 (高野長英) | 란학자, 의사 |
니노미야 케이사쿠 (二宮敬作) | 의사, 지볼트의 제자 |
이토 겐보쿠 (伊東玄朴) | 란학자, 의사 |
코세키 산에이 (小関三英) | 란학자, 의사 |
이토 케이스케 (伊藤圭介) | 식물학자, 의사 |
지볼트는 나루타키 학원을 운영하며 일본의 문화와 자연에 대한 탐구와 연구를 병행했다. 그는 환자들로부터 진료의 대가로 받은 다양한 물품들을 수집했는데, 이는 훗날 그의 방대한 민족지학 수집품의 기초가 되었다. 이 수집품에는 당시 일본인의 일상 용품, 목판화, 각종 도구 및 수공예품 등이 포함되었다.
또한 1825년에는 데지마에 식물원을 조성하여 일본을 떠날 때까지 1,400종 이상의 식물을 재배하며 연구했다. 그는 일본 차(茶) 종자를 당시 네덜란드령 동인도였던 자바로 보내기도 했는데, 이는 자바섬 차 재배의 시초가 되었다.
2. 4. 일본 여성과의 만남
지볼트는 일본 체류 중 구스모토 타키와 사실혼 관계를 유지했으며,[1] 1827년에는 딸 구스모토 이네를 낳았다.[1] 지볼트는 타키를 おたくさ|오타쿠사일본어라고 불렀는데, 이는 お滝さん|오타키상일본어에서 유래한 애칭으로 추정된다. 그는 이 이름을 따서 수국의 한 품종에 '오타쿠사'라는 이름을 붙였다.
딸 구스모토 이네는 일본 역사상 서양 의학을 배운 최초의 여성 의사로 기록되었다. 그녀는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아 1882년에는 일본 황후의 시의가 되었다. 이네는 1903년 궁정에서 생을 마감했다.[1][4]
2. 5. 시볼트 사건
1826년, 지볼트는 에도(Edo)로 쇼군을 알현하기 위한 궁정 여행길에 올랐다. 이 긴 여정 동안 그는 많은 식물과 동물을 수집하는 한편, 궁정 천문학자 다카하시 가게야스로부터 일본과 조선의 상세한 지도(이노 다다타카가 제작)를 입수했다. 당시 막부는 국토 정보 유출을 극도로 경계하여 지도의 국외 반출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기에 이는 매우 위험한 행위였다.[1]결국 지볼트가 일본 북부 지역 지도를 소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일본 당국은 이를 국가 기밀 유출로 간주하고 지볼트를 반역죄 및 러시아의 스파이 혐의로 기소했다.[1] 이 사건으로 지볼트는 가택 연금 상태에 놓였고, 오랜 조사 끝에 1829년 10월 22일 일본에서 추방 명령을 받았다.[1] 이는 당시 일본의 엄격한 쇄국 정책과 정보 통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추방당하면서도 지볼트는 일본에서의 연구 성과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연구를 도왔던 일본인 협력자들이 활동을 이어갈 것이라 믿으며, 수집한 수천 점의 동식물 표본과 서적, 그리고 문제가 된 지도까지 포함한 방대한 자료를 가지고 프리깃함 '자바'호를 타고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수도였던 바타비아로 떠났다.[1] 바타비아 외곽 Buitenzorg|바위텐조르흐nl의 식물원에는 그가 가져온 2,000여 종의 살아있는 식물이 보내졌다. 1830년 7월 7일 네덜란드에 도착하기까지, 그의 첫 일본과 바타비아 체류 기간은 총 8년이었다.[1]
비록 지볼트는 추방되었지만, 유럽으로 돌아가서도 일본에 대한 방대한 연구 자료를 정리하고 출판하여 서양 세계에 일본의 자연과 문화를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후 1854년 일본이 개항하고 1858년 일란 수호 통상 조약이 체결되면서 지볼트에 대한 추방령도 해제되었다.
2. 6. 귀국 후
1830년, 필리프 프란츠 폰 지볼트는 브뤼셀에서 정치적 소요가 발생하여 곧 벨기에 혁명으로 벨기에가 독립하게 되자 네덜란드로 돌아왔다. 그는 요한 밥티스트 피셔(Johann Baptist Fischer)의 도움을 받아 앤트워프에 있던 민족지학 수집품과 브뤼셀의 식물 표본들을 서둘러 레이던으로 옮겼다.[1] 살아있는 식물 표본들은 겐트 대학교로 보냈는데,[1] 이 희귀하고 이국적인 식물 수집품은 이후 겐트가 원예 분야에서 명성을 얻는 데 기여했다.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겐트 대학교는 1841년 지볼트에게 그의 원래 수집품에 있던 모든 식물의 표본을 증정했다.지볼트는 방대한 수집품을 가지고 레이던에 정착했다.[1] 그의 "필리프 프란츠 폰 지볼트 수집품"은 일본에서 가장 초기에 수집된 식물 표본 중 하나로, 많은 기준 표본을 포함하고 있다. 약 12,000점의 표본으로 구성된 이 수집품을 통해 그는 약 2,300종을 기술할 수 있었으며, 오늘날에도 그의 연구 깊이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서 지속적인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네덜란드 정부는 상당한 금액으로 이 수집품 전체를 구매했다. 또한 지볼트는 네덜란드 국왕 빌럼 2세로부터 상당한 연금을 받았으며 '일본 문제에 대한 국왕 고문'으로 임명되었고, 1842년에는 기사 작위를 받았다.
1831년, "지볼트 수집품"은 일반에 공개되었고, 1837년에는 자택에 박물관을 설립했다. 이 작은 개인 박물관은 훗날 레이던의 국립 민족학 박물관으로 발전하는 기초가 되었다.[6] 지볼트의 일본 내 후임자였던 하인리히 뷔르거(Heinrich Bürger)는 일본에서 수집한 식물 표본들을 세 차례 더 지볼트에게 보냈다. 이 표본들은 레이던 네덜란드 국립 식물 표본관의 일본 식물 컬렉션의 기반이 되었다.[7] 그가 수집한 동물 표본들은 레이던의 국립 자연사 박물관(Rijksmuseum van Natuurlijke Historie)에 보관되었는데, 이 기관은 나중에 Naturalis가 되었다. 두 기관은 2010년 Naturalis 생물다양성 센터로 통합되어 현재 지볼트가 레이던으로 가져온 모든 자연사 수집품을 관리하고 있다.[8]

귀국 후 지볼트는 일본에서의 경험과 수집품을 바탕으로 방대한 저술 활동에 몰두했다. 그의 대표적인 저작은 다음과 같다.
- '''일본''' (Nippon. Archiv zur Beschreibung von Japan und dessen Neben- und Schutzländern: Jezo mit den südlichen Kurilen, Krafto, Koorai und den Liukiu-Inseln|일본. 일본 및 그 부속 및 보호령 국가에 대한 기록: 남 쿠릴 열도, 사할린, 코라이, 류큐 열도를 포함한 예조ger): 1832년부터 1852년까지 총 7권으로 라이덴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은 유럽 사회에 일본을 체계적으로 소개한 기념비적인 저작으로 평가받는다. 1897년 그의 아들들에 의해 2권으로 개정 및 증보판이 출간되었다. 한국 관련 부분("코라이", Koorai)은 프리츠 보스(Frits Vos)가 번역하고 보두인 발라벤(Boudewijn Walraven)이 편집하여 2010년 한국사 저널에 게재되었다. ([https://web.archive.org/web/20160304075724/http://www.koreanhistories.org/files/Volume_2_2/KH2_2_Koorai.pdf ''19세기 초 라이덴의 한국학''])
- '''플로라 자포니카''' (Flora Japonica|플로라 자포니카lat): 요제프 게르하르트 추카리니(Joseph Gerhard Zuccarini)와 공동으로 1835년부터 1870년까지 라이덴에서 출간한 일본 식물 연구서이다.
- 기타 식물학 논문: 추카리니와 함께 일본에서 수집한 새로운 속의 식물(1843), 일본 식물의 자연 분류(1845, 1846) 등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1845년, 지볼트는 헬레네 폰 가거른(Helene von Gagern, 1820–1877)과 결혼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이후에도 지볼트는 일본 문제에 깊이 관여했다. 1853년에는 미국 동인도 함대를 이끌고 일본 개항을 요구하러 온 매슈 페리 제독에게 일본 관련 자료를 제공하며 군사적 충돌을 피하도록 조언하기도 했다. 1854년 일본이 개항하고 1858년 네덜란드-일본 수호 통상 조약이 체결되면서 지볼트에 대한 추방령도 해제되었다.
1859년, 그는 네덜란드 무역 회사(Nederlandsche Handel-Maatschappij)의 고문 자격으로 다시 일본을 방문했다. 1861년에는 일본 막부의 요청으로 대외 교섭 고문을 맡기도 했으나, 서구 열강의 압력과 일본 내부의 복잡한 정치 상황 속에서 큰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1862년 5월, 그는 다시 많은 수집품을 가지고 나가사키를 떠나 유럽으로 돌아왔다.
네덜란드 정부에 대일 외교 대표직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한 후, 1864년 네덜란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인 뷔르츠부르크로 돌아갔다. 이후에도 파리를 방문한 일본 사절단과의 교류, 뷔르츠부르크와 뮌헨에서의 일본 박물관 전시 등 일본과 관련된 활동을 이어갔다.
1866년 10월 18일, 지볼트는 뮌헨에서 감기에 걸린 후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2. 7. 재방문과 말년
유럽으로 돌아온 지볼트는 일본에 대한 지식을 활용하고자 했다. 1852년부터 보파르트에 거주하며 프로이센 주재 러시아 대사 폰 부드베르크-뵈닝하우젠 남작과 서신을 교환했고, 이를 계기로 러시아 정부로부터 일본과의 무역 관계 개설 방안에 대한 자문을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초청받았다. 그는 여전히 네덜란드 정부 소속이었으나, 이 방문 사실을 귀국 후에야 네덜란드 측에 알렸다.미국 해군 준장 매튜 C. 페리는 1854년 일본으로 항해하기 전에 지볼트와 상의했다.[10] 지볼트는 특히 타운센드 해리스에게 일본에서의 기독교 전파 방법에 대해 조언했는데, 과거 일본 체류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인들이 기독교를 "혐오"한다고 주장했다.[11]
1858년, 일본 정부는 지볼트에 대한 추방령을 해제했다. 그는 1859년 네덜란드 상사(Nederlandsche Handel-Maatschappij) 나가사키 지사 대리인 알베르트 보두인의 고문 자격으로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2년 후 그의 조언이 가치 없다고 판단되어 상사와의 관계는 끊어졌다. 나가사키에 머무는 동안 그는 여성 하녀 중 한 명과의 사이에서 또 다른 아이를 얻었다.

1861년, 지볼트는 일본 정부의 고문직을 맡아 에도로 갔다. 그는 외국 대표와 일본 정부 사이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려 했으나, 일본으로 오기 전 네덜란드 당국으로부터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은 상태였다. 결국 일본 주재 네덜란드 총영사 J.K. 드 위트는 지볼트의 해임을 요청하라는 명령을 받았고,[12] 지볼트는 바타비아(현 자카르타)를 거쳐 유럽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유럽으로 돌아온 후, 그는 네덜란드 정부에 일본 주재 총영사직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네덜란드 정부는 지볼트가 빌려 간 대출금으로 인해 막대한 빚을 지고 있었기에, 연금 지급을 제외한 모든 관계를 단절했다.
지볼트는 포기하지 않고 일본으로 다시 갈 방법을 모색했다. 러시아 정부에 고용되려 했으나 실패했고, 1865년에는 파리로 가서 프랑스 정부의 후원을 받아 일본 원정을 추진하려 했지만 이 역시 성공하지 못했다.[13] 그는 1866년 10월 18일 뮌헨에서 사망했다.[1]
3. 학문적 업적
필리프 프란츠 폰 지볼트는 일본에 체류하며 서양 의학 지식을 전수하는 한편, 생물학, 민속학, 지리학 등 다방면에 걸쳐 일본의 자연과 문화를 깊이 연구하고 관련 자료를 유럽에 소개한 선구적인 일본학(Japanology) 연구자이다. 그는 나가사키의 데지마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가와하라 게이가와 같은 일본인 화가, 하인리히 뷔르거 등 동료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방대한 양의 동식물 표본과 민족지학 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했다.
1828년 발생한 이른바 '지볼트 사건'(금지된 지도 반출 시도)으로 인해 1829년 일본에서 추방되었으나[1], 이때 수집품 대부분을 유럽으로 가져갈 수 있었다.[1] 1830년 네덜란드 레이던에 정착한 그는[1] 가져온 자료들을 정리하고 연구하여 《Flora Japonica|플로라 자포니카la》, 《Fauna Japonica|파우나 자포니카la》 등 중요한 학술 서적을 출판했다.[1] 이 저작들은 당시 서양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일본의 동식물상을 체계적으로 소개하며 유럽 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지볼트의 수집품은 네덜란드 정부에 의해 구매되었고, 이는 레이던 국립 민족학 박물관[6] 및 Naturalis 생물다양성 센터[8] 소장품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의 연구와 수집 활동은 서양 세계의 일본 이해를 심화시키고 근대 일본학 연구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일본어 연구 자체는 조수였던 요한 요제프 호프만이 주로 담당했다. 2005년 레이던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지볼트 하우스(SieboldHuis) 박물관이 개관했다.
3. 1. 생물학

지볼트의 주요 관심사는 일본 동식물 연구에 집중되었다.[1] 그는 가능한 한 많은 자료를 수집했으며, 나가사키의 데지마에 있는 집 뒤에 작은 식물원을 만들어 1,000종이 넘는 자생 식물을 모았다.[1] 특별히 지어진 온실에서는 일본 식물이 네덜란드 기후에 적응하도록 재배했다. 그의 연구는 나가사키에 설립한 의학 학교 ''나루타키-주쿠''[3]의 학생들과 이토 게이스케, 미즈타니 슈게로쿠, 오코치 존신 등 일본인 협력자들의 도움을 받았다. 가와하라 게이가와 같은 지역 예술가들은 식물 삽화를 그렸고, 일본인 사냥꾼들은 희귀 동물 표본 수집을 도왔다. 그의 조수이자 후계자인 하인리히 뷔르거 역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유럽에 옥잠화, 수국 등 친숙한 정원 식물을 처음 소개했으며,[1] 차나무의 발아 씨앗을 바타비아의 식물원으로 보내 당시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자바에서 차 문화를 시작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가 들여온 일본 호장근(''Reynoutria japonica'')이 유럽과 북미에서 침입종 잡초가 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5]
지볼트는 수집한 방대한 생물 표본들을 레이덴, 겐트, 브뤼셀, 앤트워프 등 유럽 여러 도시로 보냈다. 이 중에는 유럽으로 보내진 최초의 일본 장수 도롱뇽(''Andrias japonicus'') 표본도 포함되어 있었다. 1830년 벨기에 혁명의 혼란 속에서 그는 앤트워프와 브뤼셀에 있던 표본들을 레이던으로 안전하게 옮겼고,[1] 그곳에 정착하여 주요 수집품을 정리했다.
"필리프 프란츠 폰 지볼트 수집품"은 일본에서 가장 초기에 수집된 식물 표본군으로 평가받는다. 약 12,000점의 압착 표본을 포함하며, 이를 바탕으로 그는 약 2,300종의 식물을 기술할 수 있었다.[1] 이 식물 표본들은 레이던의 네덜란드 국립 식물 표본관 소장품의 기초가 되었으며,[7] 동물 표본은 레이던 국립 자연사 박물관(Rijksmuseum van Natuurlijke Historie)에 보관되었다.[1] 두 기관은 2010년 Naturalis 생물다양성 센터로 통합되어 현재 지볼트가 수집한 전체 자연사 수집품을 관리하고 있다.[8] 이 표본들은 모식 표본으로 지정되는 등 오늘날에도 중요한 연구 자료로 활용되고 있으며, 전자화 작업도 진행 중이다.
지볼트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중요한 학술 서적들을 출판했다.
- 《''Flora Japonicala''》: 독일 식물학자 요제프 게르하르트 주카리니와 협력하여 1835년부터 출판했다. 지볼트 사후인 1870년 F.A.W. 미켈에 의해 완간되었다.[1] 이 책은 지볼트의 과학적 명성을 유럽 전역에 알리는 데 기여했다.
- 《''Fauna Japonicala''》: 코엔라트 야콥 테밍크, 헤르만 슐레겔, 빌렘 데 한 등 당시 레이던 국립 자연사 박물관의 동물학자들이 지볼트가 수집한 동물 표본(일부는 후임자인 하인리히 뷔르거가 수집)을 연구하여 1833년부터 1850년까지 간행했다.[1] 이 책을 통해 일본의 동물상은 당시 유럽 외 지역의 동물상 중 가장 잘 기술된 것으로 평가받았으며, 농어, 참돔, 닭새우 등 일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물들의 학명이 처음으로 확정되었다.
그의 공헌을 기리기 위해 학명에 "''sieboldi''" 또는 "''sieboldii''"가 붙은 생물이 다수 존재한다.
구분 | 학명 | 한국어 이름 / 설명 |
---|---|---|
식물 | Primula sieboldii | 앵초 |
Hylotelephium sieboldii | 미세바야 | |
Berberis sieboldii | 매자나무 | |
Cirsium sieboldii | 곤드레나물 (Cirsium setidens의 이명으로 처리되기도 함) | |
Asiasarum sieboldii | 각시족도리풀 | |
Castanopsis sieboldii | 종가시나무 | |
Stachys sieboldii | 초석잠 (Stachys affinis의 이명) | |
Viburnum sieboldii | (일본 특산종 나무) | |
Populus sieboldii | 사시나무의 일종 | |
동물 | Conus sieboldii | 아코메가이 (고둥의 일종) |
Pharaonella sieboldii | 베니가이 (이매패류) | |
Pheretima sieboldi | 지볼트 지렁이 (대형 지렁이) | |
Anotogaster sieboldii | 왕잠자리 (일본 최대 잠자리) | |
Nipponocypris sieboldii | 누마무츠 (잉어과 담수어) | |
Pristipomoides sieboldii | 히메다이 (붉돔과 해수어) | |
Treron sieboldii | 녹색비둘기 (비둘기의 일종) |
3. 2. 의학
1823년 8월, 쇄국 시대 일본의 유일한 대외 창구였던 나가사키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관 의사'''로 부임했다. 독일인이었던 지볼트는 네덜란드어 발음이 부정확하여 의심받았으나, 자신을 네덜란드 산지 출신이라 둘러대며 위기를 모면했다. 당시 일본인들은 네덜란드에 산이 없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이 변명을 받아들였다.데지마 상관 의사로 활동하면서도, 1824년에는 상관 부지 밖에 나루타키 학원을 열어 일본인들에게 서양 의학, 즉 '''란학''' 교육을 시작했다. 이곳에는 일본 전역에서 많은 의사와 학자들이 모여들었으며, 대표적인 제자로는 다카노 조에이, 니노미야 케이사쿠, 이토 겐보쿠, 코세키 산에이, 이토 케이스케 등이 있다. 이들은 훗날 일본 의학 및 학계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지볼트는 특별히 나가사키 시내에서의 진료 활동을 허가받아 지역 사회에 기여하기도 했다.
3. 3. 민속학
지볼트는 일본에서 활동하며 서양 과학 지식을 전수하는 대가로 일본의 문화와 관습에 대한 깊은 이해를 얻었다.[2] 그는 환자들을 치료하며 신뢰를 쌓았고, 환자들이 감사의 표시로 준 다양한 물건과 유물들은 그의 방대한 민족지학적 수집품의 기초가 되었다. 이 수집품에는 일본인들이 사용하는 일상적인 가정 용품, 목판화, 도구, 수공예품 등이 포함되었다.단순한 물품 수집을 넘어, 지볼트는 일본의 생활상을 기록하는 데에도 힘썼다. 그는 가와하라 게이가와 같은 일본인 화가들과 협력하여 식물 삽화뿐만 아니라 일본의 일상생활 모습을 담은 그림들을 제작하게 했다. 이러한 그림들은 그의 민족지학적 컬렉션을 보완하며 당시 일본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지볼트의 조수였던 화가 칼 후베르트 드 빌뇌브는 가와하라에게 서양 회화 기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지볼트가 수집한 방대한 자료들은 유럽에 일본 문화를 소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식물 표본, 동물 표본, 민족지학 자료 등을 네덜란드로 가져왔고, 이는 레이던의 국립 민족학 박물관 설립(1837년 자택 박물관에서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6] 또한, 겐트, 브뤼셀, 앤트워프 등 유럽 여러 도시로 표본을 보내 일본 연구의 확산에 기여했다.
지볼트는 일본 동식물 연구에도 집중했지만[1], 그의 활동은 단순한 학술 연구를 넘어선 측면도 있었다. 에도 궁정 여행 중 천문학자 다카하시 가게야스로부터 이노 다다타카가 제작한 일본과 조선의 상세 지도를 얻었는데, 이는 당시 일본 정부가 엄격히 금지하던 행위였다.[1] 이 사건이 발각되면서 그는 스파이 혐의로 기소되어 결국 1829년 일본에서 추방당했다.[1] 추방될 때 그는 수집한 수천 점의 동식물 표본과 민족지학 자료, 책, 그리고 문제의 지도들을 가지고 바타비아로 돌아갔다.[1]
유럽으로 돌아온 후에도 지볼트는 일본 연구를 계속했으며, 그의 수집품과 연구 결과는 유럽 사회가 일본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민족지학적 수집품은 오늘날에도 Naturalis 생물다양성 센터 등에서 관리되며[8], 당시 일본 사회와 문화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3. 4. 지리학
(작성할 내용 없음 -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지리학' 섹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4. 문화적 영향
지볼트의 문화적 영향은 그의 직접적인 활동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과 후손들을 통해서도 이어졌다. 특히 일본에서의 관계는 그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부분이다. 나가사키에서 만난 일본인 여성 구스모토 타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구스모토 이네는 일본 최초의 여성 서양 의사가 되어 일본 의학 발전에 기여했다.[25]
유럽으로 돌아간 후 헬레네 폰 가겔른과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으며, 이들 중 일부는 다시 일본과 인연을 맺었다. 장남 알렉산더 폰 지볼트와 차남 하인리히 폰 지볼트는 일본에 체류하며 통역, 외교, 고고학 연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알렉산더는 메이지 시대 주요 인물들과 교류하며 영국 공사관 통역관 등으로 일했고, 하인리히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대사관에서 근무하며 일본 고고학 연구에 기여하고 '고고학'이라는 용어를 일본에 처음 소개하기도 했다.
지볼트의 후손들은 현재까지도 일본과 독일에 남아 그의 유산을 기리고 있다. 독일에는 지볼트의 차녀 마틸데의 후손(브란덴슈타인-체펠린 가문)이 중심이 된 독일 지볼트 협회가 있으며, 일본에서는 2008년 일본 지볼트 협회가 발족하여 연구와 교류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2023년 지볼트의 일본 방문 200주년을 기념하여 나가사키 시에서 열린 기념식에는 양국 협회 관계자를 포함한 후손들이 초청되기도 했다.
다음은 지볼트의 주요 가족 및 후손 관계이다.
관계 | 이름 | 생몰년 | 주요 활동 및 비고 |
---|---|---|---|
일본 내 연인 | 구스모토 타키 | 1807–1865 | |
장녀 | 구스모토 이네 | 1827–1903 | 일본 최초의 여성 서양 의사 |
유럽 부인 | 헬레네 폰 가겔른 | 1820–1877 | |
장남 | 알렉산더 폰 지볼트 | 1846–1911 | 영국 공사관 통역관, 메이지 정부 관련 활동 |
차남 | 하인리히 폰 지볼트 | 1852–1908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대사관 통역관, 고고학 연구 (고고학 용어 첫 사용) |
차녀 | 헬레네 폰 지볼트 | 1848–1927 | 막시밀리안 폰 울름 추 엘바흐 남작 부인 |
삼녀 | 마틸데 폰 지볼트 | 1850–1906 | 구스타프 폰 브란덴슈타인 부인, 후손이 독일 지볼트 협회 활동 |
삼남 | 막시밀리안 폰 지볼트 | 1854–1887 | 네덜란드령 동인도 주둔 하사관 |
손녀 (이네의 딸) | 야마와키 타카 (구스모토 타카코) | 1852–1938 | |
증손 (하인리히의 증손) | 세키구치 타다시 | - | 지볼트 연구자, 일본 지볼트 협회 설립자 |
증손 (마틸데의 증손) | 콘스탄틴 브란덴슈타인-체펠린 | - | 지볼트 연구자, 독일 지볼트 협회 회장 |
고손 (하인리히의 고손) | 세키구치 타다스케 | - | 일본 지볼트 협회 활동 |
고손 (이네의 고손) | 구스모토 사다오 | - | 치과의사 |
6대손 (이네의 6대손) | 호리우치 카즈이치로 | - | 의사, 파우스트볼 일본 대표 |
4. 1. 일본 내 영향
1826년, 지볼트는 에도로의 궁정 여행 중 많은 식물과 동물을 수집하는 한편, 궁정 천문학자 다카하시 가게야스로부터 이노 다다타카가 작성한 일본과 조선의 상세 지도를 입수했다. 이는 당시 일본 막부가 엄격히 금지한 행위였다.[1] 지도가 발각되자, 일본 정부는 지볼트를 러시아의 스파이 혐의로 기소하고 가택 연금했으며, 1829년 10월 22일 일본에서 추방했다.[1] 이 사건은 '지볼트 사건'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본 사회에 서양에 대한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추방 후 유럽으로 돌아간 지볼트는 일본에 대한 지식을 활용하려 했다. 1854년 일본 개항을 앞두고 미국 해군 준장 매튜 C. 페리에게 조언했으며,[10] 타운센드 해리스에게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인들이 기독교를 "혐오"한다고 주장하며 선교 방법에 대해 조언하기도 했다.[11]
1858년, 일란 수호 통상 조약이 체결되면서 지볼트에 대한 추방령이 해제되었다. 그는 1859년 네덜란드 무역 회사 고문 자격으로 다시 일본을 방문했고, 1861년에는 막부의 외국 협상 고문이 되어 에도에 머물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프로이센, 러시아, 프랑스 등 서구 열강의 관리들과 접촉하며 일본 정세에 대한 정보를 활발히 제공했고, 아들 알렉산더 폰 지볼트를 시켜 일본 지도를 러시아 해군 극동 원정대 사령관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지볼트는 외국 대표와 일본 정부 사이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려 했으나, 네덜란드 당국으로부터 정치에 개입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결국 그의 활동은 네덜란드 정부와의 갈등을 야기했고, 1862년 5월 다시 일본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고 귀국했다.[12]
지볼트는 일본에 서양 학문과 문물을 소개하고 란학 연구를 촉진하여 일본 근대화 과정에 기여했다. 하지만 지도 밀반출 시도나 서구 열강에 대한 정보 제공 활동 등은 일본의 경계심을 사기도 하여, 그가 일본 사회의 서양 문화 수용 과정에서 긍정적, 부정적 측면 모두에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4. 2. 유럽 내 영향
1830년 벨기에 혁명 발발 직후 네덜란드로 돌아온 지볼트는 레이던에 정착하여 방대한 일본 관련 수집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1] 그의 수집품, 특히 식물 표본은 당시 유럽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일본 식물 연구의 귀중한 자료였다. 약 12,000점에 달하는 식물 표본 중 다수는 기준 표본이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약 2,300종을 기술할 수 있었다. 이 "필리프 프란츠 폰 지볼트 수집품"은 일본에서 체계적으로 수집된 최초의 식물 표본들로 평가받으며, 오늘날까지도 중요한 연구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네덜란드 정부는 이 수집품의 가치를 인정하여 상당한 금액으로 구매했으며, 지볼트에게 연금을 지급하고 '일본 문제에 대한 국왕 고문'으로 임명하는 등 그의 연구 활동을 지원했다. 1842년에는 빌럼 2세 국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기도 했다. 동물 표본 역시 국립 자연사 박물관에 기증되어 연구의 토대가 되었다.[8]지볼트는 1831년 자신의 수집품을 일반에 공개했으며, 1837년에는 레이던 자택에 박물관을 설립했다. 이 개인 박물관은 이후 국립 민족학 박물관으로 발전하는 토대가 되었다.[6] 그의 자연사 수집품은 네덜란드 국립 식물 표본관과 국립 자연사 박물관(현 Naturalis 생물다양성 센터)에 나뉘어 보관되며 해당 기관들의 일본 관련 소장품의 핵심을 이루게 되었다.[7][8]
지볼트는 유럽에서 일본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여러 중요한 저서를 출판했는데, 대표적으로 《'''일본'''》(Nippon, 1832-1882년 출간)[26]과 《'''일본 식물지'''》(Flora Japonica, 1835-1870년 출간) 등이 있다. 이 저술들은 당시 베일에 싸여 있던 일본의 자연, 문화, 사회를 상세히 소개하며 유럽 지식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의 연구와 저술 활동은 유럽 내 일본학 연구의 기초를 다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많은 유럽인들이 일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는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 유럽과 일본 간의 상호 문화 이해와 교류를 촉진하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지볼트는 자신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국제 관계에도 관여하려 했다. 러시아 정부의 초청을 받아 일본과의 무역 관계 개설에 대해 조언했으며[1], 1854년 일본 개항을 이끈 미국 해군 준장 매튜 C. 페리와도 항해 전 의견을 나누었다.[10] 또한 타운센드 해리스에게는 일본 내 기독교 전파의 어려움에 대해 조언하기도 했다.[11]
이처럼 지볼트는 유럽으로 돌아온 후에도 수집품 정리, 연구, 저술, 자문 활동 등을 통해 일본에 대한 지식을 유럽 사회에 전파하고, 일본학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4. 3. 한국과의 관계 (추후 추가)
(내용 없음)5. 기념 사업
필리프 프란츠 폰 지볼트의 학문적 업적과 일본과의 교류에 기여한 공로를 기리기 위해 다양한 기념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그의 활동 거점이었던 네덜란드 레이던과 일본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기념 시설이 설립되었으며, 그가 연구하거나 소개한 여러 동식물 및 지명, 시설 등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나가사키에는 그의 옛 거주지 터 근처에 기념관이 세워졌고, 그의 이름을 딴 공원도 조성되어 있다. 또한, 그의 학문적 성과를 기리는 상이 제정되기도 하였다.
5. 1. 지볼트 하우스
지볼트는 생전에 자신의 업적과 기여가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는 것에 아쉬움을 느꼈다고 전해지지만, 오늘날 그를 기리는 여러 박물관을 통해 그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네덜란드 레이던에 위치한 일본 박물관인 지볼트하우스(SieboldHuis)는 지볼트가 레이던에서 처음 거주했던 집을 개조하여 만든 곳이다. 이곳에서는 레이던에 소장된 지볼트 컬렉션 중 주요 유물들을 전시하며, 그의 업적을 기리고 일본 문화를 유럽에 소개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5. 2. 지볼트 기념관

일본 나가사키시는 지볼트의 옛 거주지인 나루타키 근처에 지볼트 기념 박물관을 세워 그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 이 박물관은 일본 최초의 외국인 기념 박물관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5. 3. 이름이 붙은 것들

식물학 및 원예 분야에서는 필리프 프란츠 폰 지볼트가 연구한 여러 식물에 그의 이름을 붙여 기리고 있다. 동물, 지명, 시설 등 다양한 분야에서도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식물
- ''단풍나무'' ''Acer sieboldianum'' (지볼트 단풍나무): 일본 원산의 단풍나무 품종.
- ''금난초'' ''Calanthe sieboldii'' (지볼트 금난초): 일본, 류큐 제도 및 대만 원산의 상록 지생 난초. (Calanthe striata의 변종으로 보기도 함)
- ''클레마티스'' ''Clematis florida'' var. ''sieboldiana'' (동의어: ''C. florida'' 'Sieboldii', ''C. florida'' 'Bicolor'): 재배가 다소 어려운 품종이지만 인기 있는 식물.
- ''Corylus sieboldiana'' (아시아 부리개 밤나무): 동북아시아와 일본에서 발견되는 개암나무의 일종.
- ''고비고사리'' ''Dryopteris sieboldii'': 가죽 같은 질감의 잎을 가진 고사리.
- ''비비추'' ''Hosta sieboldii'': 다양한 재배 품종이 있다.
- ''목련'' ''Magnolia sieboldii'' (오야마 목련): '오야마 목련'으로도 불리는 작은 목련 품종.
- ''사과나무'' ''Malus sieboldii'' (토린고 사과나무): 분홍색 꽃봉오리가 흰색으로 변하는 향기로운 꽃을 피우는 토린고 사과나무. (원래 지볼트는 ''Sorbus toringo''로 명명)
- ''앵초'' ''Primula sieboldii'' (사쿠라소, 일본어: 櫻草): 일본 숲 앵초로 알려져 있다.
- ''벚나무'' ''Prunus sieboldii'': 꽃이 피는 벚나무 품종.
- ''돌나물'' ''Sedum sieboldii'': 잎이 장미 모양으로 배열되는 다육 식물.
- ''가문비나무'' ''Tsuga sieboldii'' (일본 주목): 일본 원산의 주목.
- ''산분꽃나무'' ''Viburnum sieboldii'': 봄에는 크림색 흰색 꽃이 피고, 가을에는 붉은 열매가 검게 익는 낙엽성 큰 관목.
동물
- '''지볼트물뱀''' 또는 지볼트 매끈 물뱀[14]
- 전복의 일종인 ''말전복''(''Nordotis gigantea''): 지볼트 전복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스시 재료로 인기가 높다.[15]
- 큰 잠자리과의 한 속인 ''Sieboldius''[16]
기타
6. 참고 문헌
원서 발행 연도순, 일본어판 제목 연도순.
- 지볼트, P.F. '''''일본 자연사에 관한 보고서, 일본의 자연사 연구 현황과 기대되는 발전 및 이익에 대한 논문: 일본의 동물상에 대한 부록'''''
- 초판 출판지는 제1권이 바라비아: 출판사 미상, 1824년. 제2권이 Wirceburgi : C.P. Bonitas, 1826년.
- 지볼트, 요한 요제프 호프만, 일독 문화 협회
- 『필립 프란츠 폰 지볼트 수집 및 헤이그 왕립 박물관 소장 일본 서적 및 수고 목록』, 일본 학회 편, 도쿄: 이분도, 1937년.
- 『시볼트 수집 도서 목록』, 도쿄: 과학 서원, 카스미가세키 출판, 1988년. 위 복제
- 지볼트, P. F. '''''일본'' 1832-1882.'''
- 『시볼트 「일본」』 [26]유쇼도 서점 (전 9권)‐ 본문편 6권+도록편 3권, 1977-79년. 신판 간행
- 『시볼트「일본」의 연구와 해설』 고단샤, 1977년.
- 시볼트 『일본 및 그 인접국 속국의 연안 지도』
- 시볼트 『일본 해국에 관한 란・로의 활동』
- 지볼트, P. F.; J. G. von Zuccarini. '''''일본 식물지'', Leiden, 1835-1870.'''
- 『시볼트 일본 식물지 본문 각서편』 오바 히데아키 감수・해설, 세쿠라 마사카츠 역, 야사카 서방, 2007년.
- 『시볼트 일본의 식물』 세쿠라 마사카츠 역, 야사카 서방, 1996년.
- 『일본 식물지 시볼트 『플로라・야포니카』』 키무라 요지로・오바 히데아키 감수・해설, 야사카 서방, 1992년, 신판 2000년, 2023년.
- 『시볼트 일본 식물지』 오바 히데아키 감수・해설, 치쿠마 학예 문고, 2007년.
- 『참부 여행 중의 일기』 사이토 신 역, 시분카쿠 출판, 1983년.
- 『시볼트 에도 참부 기행』 사이토 신 역, 헤이본샤 동양문고, 와이드판 2006년.
- A. 지볼트 『지볼트 최후의 일본 여행』 사이토 신 역, 헤이본샤 동양문고, 1981년. 와이드판 2006년. 알렉산더 폰 지볼트에 의한 기록.
- 『시볼트 일기 재내일 시의 막말 견문록』 이시야마 테이이치・마키 코이치 편역, 야사카 서방, 2005년.
- 『시볼트의 일본 보고』 쿠리하라 후쿠야 편역, 헤이본샤 동양문고, 2009년.
- 『시볼트 서간집성』 야사카 서방, 2023년. 시볼트와 일본인과의 서간・313통.
- 이시야마 테이이치・카지 테루유키 편, 그 외 이자벨・다나카・판・데렌, 쿠츠자와 노리타카, 미야자키 카츠노리, 요시다 요시에
- 『시볼트 에도 참부 기행』 고 슈조 역, 고 시게이치 교정, 유쇼도 서점〈이국 총서 7〉, 1966년, 온디맨드판 (마루젠 유쇼도), 2005년.
- 『시볼트 수집 화서 목록』 야기 서점, 2015년
- 고 슈조『시볼트 선생―그의 생애 및 공업』, 헤이본샤 동양문고 (전 3권), 와이드판 2008년.
- 『시볼트 일본 교통 무역사』 고 슈조 역, 고 시게이치 교정, 유쇼도 서점〈이국 총서 8〉, 1966년, 온디맨드판 (마루젠 유쇼도), 2005년.
- 『시볼트 연표 생애와 그 업적』 이시야마 테이이치・미야자키 카츠노리 편, 야사카 서방, 2014년.
- 베르너 시볼트 『시볼트, 파란만장한 생애』 사카이 사치코 역, 도부츠샤, 2006년.
- 『신문총집 명치편년사』 제1권 (유신 대변혁기 분큐 2 - 메이지 5년), 도쿄: 린센샤, 재판, 1936 (쇼와 11년).
- 27쪽 "게이오 3년 3월: 시볼트 유품 해외 반출".
- 333쪽 "메이지 3년 4월: 시볼트 유품 일본에 기증".
- 나가시마 쇼이치 『나가사키 박식 수첩』, 나가사키시: 나가사키 방송, 1972년. 개제 재판, 도쿄: 아시쇼보, 1997년.
- 나가시마 쇼이치 『나가사키 박식 수첩 속』, 나가사키 방송, 1977년.
- 나가시마 쇼이치 『나가사키 박식 수첩 속속』, 나가사키 방송, 1983년.
- 다나카 마나부 "제4장 학명에 이름을 남긴 일본 식물 연구의 선구자들: 3. 독일인: 시볼트 P.F.von Siebold" 『식물의 학명을 읽다 : 린네의 "두 이름 법"』 히가시쿠루메: 다나카 마나부, 도쿄: 아사히 신문사 (발매), 2007년, 86-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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